지는 노을의 색을 담은 햇볕이 따갑게 눈을 찔러오는 통에 잠에서 깼다. 밤새 내리던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도로와 달리 창문을 투과하는 햇볕은 따뜻했다. 누군가 나직한 목소리로 알음알음 나누는 대화의 사이 가끔 들리는 웃음소리만 존재하는 버스 안에서 순영은 느리게 호흡했다. 새로운 무언가를 기획하는 일은 언제나 힘든 법이다. 회의와 격무에 시달리는 내내 그런...
열린 창으로 처마를 타고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흙바닥 위로 뿌연 물안개를 만들어 냈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분명히 젖을 운동화처럼, 피하려 해도 결국엔 마주쳐야 할 일이 있다. ‘권순영!’ 정한처럼 영생을 산다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이 순영에게도 있다. 한 사이즈 큰 남색 조끼를 헐렁하게 걸친 몸이 금세 순영을 따라잡...
순영은 제 짐을 정리했다. “네 집으로 가, 순영아.”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들린 말이 꼭 사형선고 같았다. 정한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담담했던 탓에 차마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가 캐리어를 찾아야 했다. 함께 지낸 시간에 비해 짐은 단출했다. 작은 캐리어를 힘주어 닫는 소리가 방안을 울리는...
눈을 떴다. 순영은 지난밤의 기억이 몰려들기도 전, 숙취로 욱신대는 머리를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몇 대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두통에 비틀대며 거실로 나왔다. 정한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순영은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가, 이내 제 죄를 떠올리곤 조심스레 정한의 곁으로 다가갔다. “깼어?” 순영의 예상과는 달리 정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가끔은 덤...
“자, 축하합시다!” “와아!” 회의실 내부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왁자지껄한 대화의 틈에서 서류를 내려놓고 목덜미를 주무르던 순영의 어깨 위로 가벼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고생 많았어요, 순영 씨.”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유영을 본 순영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리님도 수고하셨어요, 하는 순영을 가만히 보던 유영은 결국 아...
꿈은 ……있는 자들이나 꾸는 것이지. 정한은 멍청한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려다 멈췄다. 고운 옷을 입고 고운 미소를 짓던 이의 말로는 얼마나 눈물겹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는가. 수천 송이의 꽃으로도 위로할 수 없던 한 떨기의 꽃이 진 곳에서 고개를 숙이고 선 이후로 내내 떠날 수 없는 긴 꿈이었다. 땀으로 젖었던 옷이 서서...
따끔거리는 순영의 마음 한구석과는 달리 정한의 태도는 평소와 같았다. 덤덤해 보이는 얼굴에 순영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하기야, 정한이 살아온 세월엔 순영 자신보다 더한 사람이 있으면 있었지 없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한은 순영의 마음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었다. 어느 생엔 유들유들한 말씨와 화려한 언변으로 궁둥이를 붙이고 앉는 곳마다 사람을 끌어모...
순영과의 생활이 정한에게 굉장한 메리트를 주진 않지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순영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한은 인스턴트나 그 외의 맛있는 것들을 좋아했다. 기척을 죽인 채 홀로 먹는 것보단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있는 게 좋았다. 순영과 함께 움직이면 관심이 정한에게로 덜 오는 것도 편했다. 내킬 때마다 나서는 산책에 따라붙는 행동도 나쁘지 않았...
정한은 순영의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았다. 순영이 주문하는 반찬에 불평은 없어도 감자볶음을 덜어놨던 접시에 채 썬 당근이 남아 있는 게 그랬다. 순영 은 그쪽 같은 사람…? (여전히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도 편식을 하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대답을 들을 확률보다 정한의 화를 돋울 확률이 높다는 것을 잘 알았다. 순영은 말을 아낄 줄 알았다. 집을 ...
권순영이 윤정한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일로, 정한은 화를 냈고 순영은 화를 내지 않았다. 아무도 몰랐고 앞으로도 몰랐을 정한의 비밀을 작은 실수로 순영이 알게 된 게 사건의 전말이자 전부였다. 계약서의 조항은 빼곡했고 순영은 설렁설렁 사인했으며 정한은 순영이 미덥지 않았지만 살아보면 달라질 일이라고 생각은 했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
SVT RPS 윤홋과 내키는페스
무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